경전

전경

행록 1장 1절
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ㆍ우창(愚昌)ㆍ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곳에 살았도다.
행록 1장 2절
 이곳은 예로부터 봉래산(蓬萊山)ㆍ영주산(瀛洲山) 일명 신선봉(一名 神仙峰)ㆍ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어 오던 곳이로다.
행록 1장 3절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洲山)이 우뚝 솟으니 그 뒷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도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기복연면하여 시루산을 이룩하였도다.
행록 1장 4절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ㆍ강동(講洞)ㆍ배장골(拜將谷)ㆍ시목동(柿木洞)ㆍ유왕골(留王谷)ㆍ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 사거리(德川四巨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행록 1장 5절
 객망리에 강씨 종가인 진창 어른부터 六대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탄강하셨으니, 상제의 성은 강(姜)씨이요, 존는 일순(一淳)이고 자함은 사옥(士玉)이시고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니라. 때는 신미(辛未)년 九월 十九일인 즉 이조 고종(李朝高宗) 八년이며 단기로서는 四千二百四년이고 서기로는 一千八百七十一년 十一월 一일이로다.
행록 1장 6절
 그리고 그 탄강하신 마을을 손바래기라고 부르며 당시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井邑郡德川面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도다.
행록 1장 7절
 객망리는 상제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도다.
행록 1장 8절
 부친의 휘는 문회(文會)이며 자는 흥주(興周)이고 그는 범상에 우렁찬 음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의 위엄은 인근 사람만이 아니라 동학의 의병들에게까지 떨쳤도다.
행록 1장 9절
 모친은 권(權)씨이며 는 양덕(良德)이니 이평면(梨坪面) 서산리에 근친가서 계시던 어느 날 꿈에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몸을 덮으면서 천지가 밝아지는도다. 그 뒤에 태기가 있더니 열석 달 만에 상제(上帝)께서 탄강하셨도다.
행록 1장 10절
 상제께서 탄강하실 때에 유달리 밝아지는 산실(産室)에 하늘로부터 두 선녀가 내려와서 아기 상제를 모시니 방 안은 이상한 향기로 가득 차고 밝은 기운이 온 집을 둘러싸고 하늘에 뻗쳐 있었도다.
행록 1장 11절
 상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으실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
행록 1장 12절
 상제께서 일곱 살 때에 어느 글방에 가셨는데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운자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
이라고 지으셨도다.
행록 1장 13절
 상제께서 글방에 다니실 때 훈장으로부터 들으신 것은 그 자리에서 깨우치시고 언제나 장원하셨도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도다. 훈장이 서동(書童)들의 부모에 미안함을 느껴 속으로 다음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고 시험을 뵈었으나 역시 상제께서 장원하셨던바 이것은 상제께서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그로 하여금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신 까닭이라고 하도다.
행록 1장 14절
 상제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 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 덕안이 곧 돌아와서 상제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상제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
행록 1장 15절
 상제께서는 어렸을 때 남달리 장난을 즐기셨도다. 강 연회(姜然會)와 강 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상제님과 힘자랑을 하였느니라. 상제께서는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데 중쇠를 이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더라.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한 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十여 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상제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아니하니라. 어느 날 여럿이 상제와 장난하는데 상제께서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를 돌리듯이 하시더라고 김 광문은 전하도다.
행록 1장 16절
 상제께서 여러 글방으로 자주 드나드실 때 글씨의 청을 받으시면 반드시 글줄 끝마다 한두 자쯤 쓸 만한 빈 곳을 남기고 써 주셨도다.
행록 1장 17절
 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五十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상제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상제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행록 1장 18절
 상제께서 정해(丁亥)년 어느 날 외가에 행하셨도다. 어떤 술주정꾼이 까닭없이 상제께 욕설을 퍼붓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아니하시니 난데없이 큰 돌절구통이 떠 와서 그의 머리 위를 덮어씌우니 그는 절구통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니 상제께서 몸을 돌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도다.
행록 1장 19절
 상제께서 송광사(松廣寺)에 계실 때 중들이 상제를 무례하게 대하므로 상제께서 꾸짖으시기를 “산속에 모여 있는 이 요망한 무리들이 불법을 빙자하고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독만 끼치고 있는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하시고 법당 기둥을 잡아당기시니 한 자나 물러나니 그제야 온 중들이 달려와서 백배사죄하였도다. 그 뒤에 물러난 법당 기둥을 원상대로 회복하려고 여러 번 수리하였으되 그 기둥은 꼼짝하지 않더라고 전하는도다.
행록 1장 20절
 상제께서 갑오(甲午)년에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溝郡草處面內主洞)에 있었도다.
행록 1장 21절
 이해에 고부인(古阜人) 전 봉준(全琫準)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반항하니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때에 금구인 김 형렬(金亨烈)이 상제의 성예를 듣고 찾아뵌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하므로 글방을 폐지하고 전주군 우림면 동곡(全州郡雨林面銅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하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셨던바 그곳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도다.
행록 1장 22절
 갑오년 五월 어느 날 밤 상제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중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나도 후천 진인이라. 천지현기와 세계대세를 비밀히 의논할 일이 있노라”고 아뢰는도다.
행록 1장 23절
 전 봉준(全琫準)이 학정(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
행록 1장 24절
 고부 지방의 유생들이 을미(乙未)년 봄에 세상의 평정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었을 때 상제께서 이에 참여하시니라. 이때 한 노인이 상제를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모셔가더니 작은 책 한 권을 전하거늘 그 책을 통독하셨도다.
행록 1장 25절
 유생들은 세상이 평온하다고 하나 세도는 날로 어지러워졌도다. 상제께서 이때 비로소 광구천하하실 뜻을 두셨도다.
행록 1장 26절
 五월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상제의 부친을 보고 유 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상제를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삼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온데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 후 상제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 말씀하며 위로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상제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 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
행록 1장 27절
 상제께서 임인년 어느 날 김 형렬과 함께 금산사(金山寺) 부근의 마을에 가서 계셨도다. 이 부근의 오동정(梧桐亭)에 살고 있던 김 경안(金京安)이란 사람이 기독교의 신약전서를 가지고 있었던바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신약전서 한 권을 구하게 하시니라. 그는 이르신 대로 그로부터 책을 빌려다 상제께 드렸더니 상제께서 그것을 불사르셨도다.
행록 1장 28절
 그 후 어느 날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오동정을 찾아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이 자리에 경안이 찾아와서 빌려준 신약전서를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형렬이 우물쭈물하면서 딱한 표정만 짓고 앉아 있노라니 상제께서 가름하시면서 “곧 돌려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마침 이때에 그곳을 한 붓 장수가 지나가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불러들이고 음식을 권한 다음에 그 붓 상자를 열어보이라고 청하시니 그가 분부에 좇으니라. 상제께서 “그대는 예수를 믿지 아니하니 이 책은 소용이 없을 터이므로 나에게 줄 수 없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음식 대접을 받은 터이어서 기꺼이 응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책을 경안에게 돌려주시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하였도다.
행록 1장 29절
 상제의 신성하심이 하운동(夏雲洞)에도 알려졌도다. 이곳에 이 선경(李善慶)이란 자의 빙모가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인을 찾고 “그대의 아내가 四十九일 동안 정성을 들일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 분부하시니라. 주인은 명을 받은 대로 아내와 상의하니 아내도 일찍부터 상제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다시 주인에게 어김없는 다짐을 받게 하신 뒤에 공사를 보셨도다. 그 여인은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에 준비하니라. 이렇게 여러 날을 거듭하니 아내가 심히 괴로워하여 불평을 품었도다. 이날 한 짐 나무를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아 아내가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노라니 상제께서 주인을 불러 “그대 아내는 성심이 풀려서 떡이 익지 않아 매우 걱정하고 있으니 내 앞에 와서 사과하게 하라.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고 이르시니라. 주인이 아내에게 이 분부를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사랑방에 나와 상제께 사과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시루를 열어보니 떡이 잘 익어 있었도다. 부인은 이로부터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 四十九일을 마치니 상제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 정성을 치하하시므로 부인은 정성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니 상제께서 부인을 위로하고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오색 채운이 달을 끼고 있는 그 증거를 보라”고 하셨도다.
행록 1장 30절
 상제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 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상제께서 “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 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상제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행록 1장 31절
 김 형렬은 상제를 모시고 있던 어느 날 상제께 진묵(震黙)의 옛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서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직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에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그리고 진묵은 밤마다 북두칠성을 하나씩 그 빛을 가두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여 七일 만에 모두 숨겨버렸다 하나이다. 태사관(太史官)이 이 변은 하늘이 재앙을 내리심이니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시어 옥문을 열고 천의에 순종하사이다 하고 조정에 아뢰오니 조정은 그것이 옳음을 알고 대사령을 내렸다 하나이다.”
 이 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였으리라. 내가 이를 본받아 한 달 동안 칠성을 숨겨서 세상 사람들의 발견을 시험하리라” 하시고 그날 밤부터 한 달 동안 칠성을 다 숨기시니 세상에서 칠성을 발견하는 자가 없었도다.
행록 1장 32절
 상제께 김 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 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 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 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1장 33절
 상제께서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부터 관을 버리시고 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속옷을 검은 것으로 외의를 흰 것으로 지어 입으셨도다. “저 일진회가 검은 옷을 입었으니 나도 검은 옷을 입노라” 말씀하시고 문밖에 나오셔서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 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 하셨도다.
행록 1장 34절
 상제께서 구릿골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시고 그곳에서 월여를 보내시다가 다시 회선동(會仙洞)에 이르시니라. 이곳에 김 보경(金甫京)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 외당에 상제께서 계셨도다. 이때 그는 모친의 위독함을 상제께 아뢰니라. 이를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오늘 밤은 명부사자(冥府使者)가 병실에 침입하여 나의 사자의 빈틈을 타서 환자를 해할 것이니 병실을 비우지 말고 꼭 한 사람이 방을 지키면서 밤을 새우라” 하시니라. 보경이 이르심을 좇아 가족 한 사람씩 교대로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기로 하고 가족들을 단속하였느니라. 여러 날이 계속되매 식구들이 졸음에 못 이겨 상제의 이르심을 잊어 갔도다. 이날 밤 보경이 깨어 방을 지키다가 깜박 잠에 빠졌던바 이때 상제께서 외당에서 급히 소리쳐 부르시니라. 그가 놀라 깨어 보니 벌써 모친은 운명하여 있었도다. 상제께서 말씀하신 나의 사자는 바로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로되 식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행록 1장 35절
 이날 밤에 객망리 앞 달천리에 별안간 우레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자 오 동팔(吳東八)의 집이 무너졌도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니라. 그 후 얼마 지나 그가 무너진 집의 재목을 모아 가지고 집을 세우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였으되 그때마다 집이 무너지는도다. 그는 부득이 술집을 거두고 움막을 치고 농사로 업을 바꿨느니라. 농사로 살아오던 어느 날에 면이 없는 사람이 와서 움막살이의 참상을 보고 손수 집을 한나절 만에 세우고 흔적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지라. 사람들은 수십 일 걸릴 일을 하루도 못 되게 완성한 것에 크게 놀랐도다. 사람들은 이것이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사 신장을 보내신 덕이라 믿고 더욱 상제를 좇는도다.
행록 1장 36절
 김 형렬은 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상제를 모시고 있었도다. 그러던 어느 날 형렬이 상제의 말씀 끝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 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가 있는 주택의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못하고 녹는다 하나이다”라고 아뢰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러하랴. 이제 나 있는 지붕을 살펴보라” 하시니라. 형렬이 밖에 나가 살펴보니 일기가 차고 백설이 쌓였는데도 오직 계시는 그 지붕에 한 점의 눈도 없을 뿐 아니라 맑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 구름이 가리지 못하고 푸른 하늘에까지 통하니라. 그 후에도 살펴보면 언제나 상제께서 머무시는 곳에 구름이 가리지 못하는도다.
행록 1장 37절
 금산사 청련암(靑蓮庵)의 중 김 현찬(金玄贊)이 전부터 상제의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상제를 만나게 되어 명당을 원하니 상제께서 그에게 “믿고 있으라”고 이르셨도다. 그 후 그는 환속하여 화촉을 밝히고 아들을 얻었느니라. 그리고 김 병욱(金秉旭)이 또한 명당을 바라므로 상제께서 역시 “믿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도다. 그 후 그도 바라던 아들을 얻었느니라. 수년이 지나도록 명당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기에 병욱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받았느니라”고 이르시고 “선천에서는 매백골이장지(埋白骨而葬之)로되 후천에서는 불매백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之)니라”고 말씀을 하셨도다. 그 후 얼마 지나 현찬이 상제를 뵈옵고 명당을 주시기를 바라므로 상제께서 “명당을 써서 이미 발음되었나니라”고 말씀이 계셨도다.
행록 1장 38절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상제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때가 있느니라. “고부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친족들이 계시는도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항렬을 좇아 말하게 되느니라. 이것은 윤리상 전통이라.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만 모든 신명은 그들의 불경한 언사를 옳지 않게 여기고 반드시 죄로 인정하느니라.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친족과의 왕래를 적게 하느니라” 하셨도다.